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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

이응준 작가 고독한 밤에 호루라기를 불어라 감상 글 3

by 벼나무 2024. 5.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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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응준 작가의 고독한 밤에 호루라기를 읽고 나서 새로운 책을 읽고 있다. 책 한 권을 펼치는 것은 새로운 세상으로 들어가는 문을 열고 들어가는 것과 같다. 기억을 더듬어 글을 써보려고 한다. 

 

99쪽 "세상에 대한 성찰이란 세상에 대한 긍정이 아니라 세상에 대한 부정에서 나오는 것이 아닐까 한다. 긍정 없이 살아가자는 게 아니다 그래야 진짜 긍정이 찾아진다는 말이다. 어둠이 있어야 빛이 드러난다. 그래야 우리는 빛과 어둠으로 아름다운 그림을 그릴 수 있다. 작은 촛불도 아름다운 것은 어둠 때문이다."

 

나는 긍정적이 되기 위해 부정적인 요소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사람이다. 기쁨을 안다는 것은 슬픔을 겪어봤기 때문이고, 행복하다는 것은 그 반대인 불행을 느껴봤기 때문이다. 그 반대로 세상에 대해 부정적인 사람은 부정적인 면의 존재 가치를 인정하고 높이는 사람인가?  

 

102쪽 "인간은 전부 스스로의 신생이 유별나다고 믿고 그것을 누군가에게 고백하고 싶어 하는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사실상 그들이 내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란 'UFO 목격담' 따위가 아니라 '고독이 아닐까? '고독을 고백하고 싶은 인간이 아닐까? 이래서 나는 20세기 이후의 작가란 어쩌면, 인간의 죄와 고독을 죄 사함 없이 경청해 주는 '현대의 사제'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가져 보는 것이고...."

 

사람들과 얘기하다보면 유독 자기 얘기를 하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의 고독을 고백하고 싶어 하는 것인지 한 번 살펴봐야겠다. 

 

108쪽 "누구는 이렇듯 괴로워하는 나더러 사랑을 해 보라지만, 사랑이 두려운 것은 사랑하던 사람들이 미워하게 되기 때문이 아니다. 그토록 사랑하던 사람들이 업신여기게 되기 때문이다. 사랑하던 사람에게서 업신여김 당하는 것은 인생의 가장 잔인한 형벌이다. 그래서 누군가는 다신 사랑을 하지 않는다. 그토록 사랑하던 사람을 업신여길까 봐서, 그토록 사랑하던 사람에게서 업신여김 당할까 봐서, 불행이란 이런 것이다."

 

애초에 미성숙한 사람이 있던 것을 처음 만났을 때 알아보지 못한 것일까 아니면 만남을 이어가면서 상호작용의 관계 속에서 업신여기는 사람으로 변화한 것일까? 어쨌든 전자이든 후자이든 내 선택의 문제 아닐까?

 

109쪽 "내가 20년 가까이 살았던 아파트 단지에는 몸을 제대로 못 가누는 젊은 아들을 부축하여 매일 동네를 아주 천천히 정말이지 못 견딜 정도로 천천히 돌고 도는 한 어머니가 있었다. 그 모자는 틀림없이 요즘도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그러할 것이다. 타인의 불행을 통해 지금의 내 행복을 발견하는 것은 죄일까? 아니다. 동정도 아니고 교만도 아닌 그것은 진정 죄가 아니다. 타인의 불행을 향해 깔보고 즐거워하는 것은 악행이지만, 내가 엄연히 가지고 있으면서도 평소 무시하거나 까먹고 있는 행복을 자각하는 것은 겸손이자 깨달음일 것이다."

 

겸손해지고 감사하자

 

 

111쪽 마지막 줄 "사랑이란 서로가 주고 받았던 상처에 관해 아무런 미움도 없이 쓸쓸히 생각하게 되는 일이니까 그런 거니까."

 

쓸쓸하게 생각되는 사랑의 기억이 있다. 사랑의 크기가 극복해야 할 문제보다 더 크지 못했던 것 같다. 그래서 쓸쓸한 것이 아닐까? 문제를 극복할 만큼 사랑이 크지 않았다면 그것이 진짜 사랑이었을까? 의심이 든다. 사실 나는 그것이 사랑이 아니었다고 결론을 내리고 있다. 

 

112쪽 3째줄 "나는 인간보다 개가 좋고, 꽃보다는 나무가 좋다. 인간이 얼마나 더러운지 알고 싶으면 나를 바라보는 내 개의 눈동자를 들여다보면 알게 된다.... 개는 사람의 말을 하지 않고 나무는 아예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그래서 더 좋다.... 키가 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며, 나의 어두운 마음을 높고 환히 일깨우는 그들에 관해."

 

이 책을 읽기 전에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실격과 샤를 보들레르의 악의 꽃이라는 책을 읽었다. 두책은 인간에 대해 갖고 있는 관점이 비슷하다. 다자이 오사무는 인간실격에서 인간이 어떻게까지 나빠질 수 있는지 묘사하고 있다. 샤를 보들레르의 악의 꽃에서도 인간과 세상에 대한 혐오를 시로 나타내고 있다. 나는 인간에 대해 호기심이 많은 사람이다. 나라는 사람을 알고 싶어서 다른 인간들을 탐구하고 싶은 건지 모르겠지만, 이것만은 확실하다 나는 기독교인으로서 모든 사람은 특별하고 사랑받아야 하는 존재라고 생각한다. 그냥 사람들이 행복했으면 좋겠다. 나름대로 사람들은 주어진 삶 속에 각자의 방식으로 행복하게 살고 있다고 받아들이려고 노력하고 있다. 나의 기준으로 그들이 행복한지 불행한지 판단하지 않기로 했다. 

 

 

126쪽 "자신이 누구인지 알고 싶은 사람은 자신에게 이렇게 물어봐야 한다. "인생의 밑바닥에 있을 적에 너는 무엇을 붙들고 있었는가? 그것이 바로 너다." 거리의 은행 나무들은 이 질문에 대한 누군가의 대답으로 서 있다."

 

 

바로 윗글에 대한 나의 질문에 작가가 대답을 해준것 같다. 인생의 밑바닥에 있었을 때 나는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놓치지 않으려고 부단히 노력했다. 나를 위해서 그렇게 했다. 사는 동안 그분의 손길이 내 삶에 개입한 일이 너무도 많기 때문이다. 물론 그 손길은 기적 같은 축복들이다.  신을 자신의 욕심을 채우려고 하나의 수단과 도구로 사용하는 타락한 기독교인들도 많지만(애초에 기독교가 아닐 수 있다.) 반대로 신앙을 통해 삶을 참되고 진실하게 살아가는 사람들도 많고 나는 그들을 존경한다. 

 

136쪽 아래 5줄 "상처를 받고 그 상처를 이기는 과정에서 능력을 얻고 그런데 그 능력이 상처의 체질이 돼 버리는 괴로움은 얼마든지 극복 가능하다. 상처를 가진 자만이 타인의 상처를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사람만이 그 어떤 어두운 현실보다 더 강한 사랑을 발견한다."

 

같은 상처를 받은 사람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아는 것 만으로 우리는 위안을 받는다. '나 혼자가 아니구나'라는 사실이 힘이 되는 경우가 있다. 그런데 상처와 사랑이 어떤 관계가 있는 걸까? 좀 더 생각해볼까? 상처를 받은 사람은 남을 이해하는 능력이 커지고 그 사람에 대한 사랑도 커질 수 있다는 뜻일까? 상처가 나에게 거름이 되어 내가 더 성숙할 기회로 삼을 수 있다.  하지만 상처를 극복하지 못하고 그 안에 갇혀 지내는 사람들도 있다. 두 사람의 차이는 뭘까?